올해는 참 희한한 일이 많았다.
업무적으로 묘한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와중에 부서 내의 담당자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바람에 선배와 내가 더 바빠졌었다.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나도 꽤 화가 났지만 유독 선배가 매우 예민해졌다. 그래서 나는 스트레스를 주는 1차 원인인 사람들 더하기 2차로 그들을 쉬지 않고 욕하는 선배 때문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으로 이중 삼중의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약 6개월 간 지속되었다.
선배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용한 편이었다가 나랑 둘만 있을 때는 뭐에 씐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 흉을 보고 험담을 멈추지 않았다. 심지어 어떤 때는 본인이 잘못한 일을 남의 잘못으로 둔갑시켜 뒤집어 씌운 뒤 욕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. 그만하라는 의미로 몇 차례 농담을 섞어 돌려 말해 보아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계속되는 험담 때문에 나는 점점 표정이 썩어갔다. 진심 엑소시스트를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...
그러다 12월 말에 학생들을 데리고 박람회를 갈 일이 생겼다. 박람회는 작은 규모인데 비해 방문객을 위한 선물과 경품 이벤트를 몇 가지 갖추고 있었다. 그 중에 100% 당첨 스크래치 복권 이벤트가 있었는데 1등 상품이 스타벅스 컵이었고 2등은 디퓨저, 3, 4등은 모르겠고 5등은 에코백이었다. 다들 복권을 긁고 나온 상품을 보며 좋아했는데 나랑 선배가 2등 디퓨저를 받았고 일행 중 몇 명이 1등 상품인 스타벅스 컵을 받았다. 그리고 선배는 스타벅스 매니아라 불릴 만큼 스타벅스를 자주 찾는 사람이었다는 게 화근이 되었다.
학생 인솔자 어른 3인(나 포함)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박람회장을 돌아보고 학생들을 관리하느라 다리가 아팠던 터라 오후부터는 박람회장 한 켠의 소파에 짐을 두고 앉아 있었는데 남자 선생님이 어딘가로 간 사이 갑자기 선배가 굳이 내 앞에서
"스크래치 복권을 한 번 더 긁고 오겠다. 스타벅스 컵을 가져야겠다."는 내용의 헛소리를 시작했다.
그 쇼파 옆에는 박람회의 다른 관련자들이 여럿 앉아 있었고 우리가 자리에 앉아 쉬는 동안 학생들 얘기를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을텐데...... 이벤트 참여는 당연하게도 한 사람이 한 번만 참여하는 것이었다. 게다가 약 2시간 전에 학생 한 명이 남자 선생님이 탄 스타벅스 컵을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본 선배가 학생에게 "그러는 거 아니야!"라고 정색을 하며 혼냈었는데, 학생들이 오가며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상품에 눈이 멀어 정작 지는 저런 짓을 한다고?!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대꾸도 하지 않았다. 설마... 아니겠지. 농담이겠지...
그런데 좀 있다가 선배는 손에 뭘 흔들면서 나타났다. 나는 굳이 고개를 들어서 선배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내리 깔은 시야에도 에코백이 들어와서 진짜로 오전에 경품 이벤트에 이미 참여해서 2등 상품을 받은 사람이 행사에 참여 안 한 척 관계자를 속이고 기어이 스크래치 복권을 또다시 긁고 왔다는 걸 알게되었다. 행사장을 출입하려면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데 거기에는 학교이름이 써져있었다. 그런 출입증을 목에 걸고 저런 부정한 짓을 한 건가? 그러더니 내 앞에 서서 또다시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.
"벌 받았나봐요. 5등 상품을 받았네."
벌? 벌이라고?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갔어야 할 상품을 담당자를 속여가며 갈취해 놓고 벌을 받아서 5등이라고? 그렇게 말하는 선배 뒤 쪽에 앉은 사람들이 선배랑 나를 흘끔거리면서 쳐다봤다. 속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왔다. 부정한 짓을 하려면 혼자 조용히 하던가. 왜 나까지 범죄에 일부분으로 만드는 거냐고!@!!1!! 그놈의 5천 원도 안 되어 보이는 에코백은 손으로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고 오던가. 진짜 미친 거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 밑까지 차올랐다.
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.
그리고 집에 와서 다시 곰곰히 생각해 봤다. 지난 6개월 동안 직장 내에서 누가 작은 실수나 귀찮은 일, 또는 당연히 할 만한 부탁을 해도 어김없이 험담의 소재로 삼아서 나를 심리적으로 지쳐가게 했던 인간이 학생들을 인솔하는 인솔자로 간 박람회에서 스타벅스 컵을 받겠다고 부정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. 그래서 카톡을 보냈다. 내용은
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 윤승진
"인솔자로서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학생들 앞에서 다른 사람이 가져야 할 상품을 갈취한 건 문제가 크다고 생각하니 업체에 돌려주기 바란다. 업체에 돌려주기 전까진 업무 외의 사적인 대화나 식사도 같이 하지 않겠다."라고
결과는? 6개월 동안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썼던 사람이 사과는 커녕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읽씹을 했다.
그동안 나를 그냥 지 욕 들어줄 대상 정도로만 생각했거나 아니면 마침 선배가 계약기간 만료로 학교를 나가기 며칠 전이라 더 이상 학교 내에서의 인맥은 필요하지 않았거나였겠지.
선배는 돈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. 얼마 전에 신형 아이폰을 샀다고 얘길 했고 그걸 부서에 가져온 날에는 묘하게도 다른 집무실의 와이파이 비번이 뭔지 아냐고 소란을 피웠다. 학교 내 무선 와이파이는 비번이 다 똑같은데? 왜 우리 부서 와이파이 비번도 아니고 자주 가지도 않는 다른 방 와이파이 비번이 뭐냐고 굳이 물어보는 걸까? 그동안 선배는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해와서 와이파이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행동이 마치 '자, 나 신형 아이폰 샀어. 알아봐 줘.'라는 행동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. 신형 아이폰을 살 돈이 있다면 스타벅스 컵 정도는 그냥 자기 돈으로 사서 쓸 것이지...
기본적인 예의도 윤리도 인륜도 저버린 선배 때문에 많은 화가 스쳐지나갔지만 그나마 좋은 점도 있었다. 선배가 퇴직하기 전까지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짜증나는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됐다는 것이다. 그리고 퇴사 이후 부서의 일이나 학교에서 생긴 일들에 대해 염탐하듯 나에게 물어보는 일을 못하게 된 것이 매우 통쾌했다. 선배는 자기가 없는 동안 부서 일이 잘 안 돌아가고 학교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걸 바라고 있었으니까. 코로나로 집에서 쉬는 동안에도 카톡으로 다른 사람들 욕을 참 부지런히도 하던 인간... 그래도 단 며칠이었지만 근무하는 동안에 이런 수준의 인간과 업무적인 얘기가 오고 가야했던 건 역시나 스트레스였다. 직장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...
어제 드디어 선배가 퇴직을 했다. 인사도 하기 싫었지만 부서 사람들 보는 눈이 있으니 예의상 인사말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.
"선배~ 여태까지 선배가 욕했던 사람들 있잖아요. 그 사람들보다 당신이 더 최악입니다. 앞으로 누구 욕하고 싶으면 그냥 본인 욕하시면 돼요. 그리고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동안에 당신이 저지른 도둑질, 품위손상에 대한 책임을 살면서 꼭 지게 될 겁니다. 세상사 사필귀정이고 인과응보는 반드시 있는 법이니까요. 당신이 남의 기회와 물건을 훔쳤으니 그 물건 돌려주기 전까지 당신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기회와 물건도 앞으로 계속 잃게 될 것입니다.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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